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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Coco, 2017) - 사랑은 애착에 선행한다

2020-03-31 05:08:35



  무속신앙과 유전학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사랑의 근원을 동종의 혈족주의로 환원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혈족주의, 또는 가족주의로의 환원은 우리에게 사랑이 조건화되는 문제를 상기시킨다. 사랑을 위한 거래가 성립되는 것이다.


  가족의 축복을 받지 못하면 우리 자신의 존재는 온전하지 않은 것만 같다. 애초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우리가 이 우주에 덩그라니 홀로 버려진 것처럼 경험하게 되는 실존적 조건 속에서, 가족의 축복마저 얻지 못한다면 그 근원적 조건은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으로 느껴지는 까닭이다. 그래서 가족은 서로를 더욱 절실하게 붙잡게 되며, 가족의 개념은 보다 가치있는 것으로서 정립되어 간다.


  이처럼 가족을 향한 애착이 커짐에 따라, 우리는 가족의 축복을 얻어낼 여러 방법론들을 강구해 왔다. 이는 공부를 잘하려고 노력한다든가, 집안일을 잘 돕는 등의, 가족의 기준에 따른 모종의 성취와 관련된 현실이 전개되어 왔음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가족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일을 함으로써 가족의 축복을 얻기 위해 부단히도 애써온 경험은, 늘 우리의 삶에서 일상적으로 만연해있던 경험일 것이다.


  그리고 이 경험이 우리에게 힘들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이것이 끝없는 조건의 교환, 즉 조건거래였던 까닭이다. 그것도 상당히 불공정한 방식의 조건거래였다.


  축복은 분명 일방통행이다. 조상이 후손에게 내려주는 것이다. 역으로 조상을 향한 후손의 축복은 아무 가치가 없는데, 그 이유는 단순명백하다. 후손이 조상을 낳을 수 없는 까닭이다.


  여기에서 조상은 마치 후손을 존재케하는 존재론적 실체의 위상, 즉 창조주와 같은 위상을 확보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온전하지 못하게 느끼는 후손이, 자신을 정당하게 존재하게 할 수 있는 조상의 초월적 권능에 당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는 구조가 생겨난다.


  자신만 목줄을 매인 것 같은 이 거래의 구조가 일견 부당하게 느껴지는 후손은, 그래서 이 구조 위에 새로운 형이상학적 규칙을 도입하기에 이른다. 그 규칙은, 후손인 자신은 분명 이 현세에서 조상을 통해서만 존재하게 되었고 또 존재할 수 있지만, 조상 역시도 후손이 기억해주지 않으면 사후세계에서 정당하게 존재할 수 없게 된다는 초월적 명령을 담고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제 서로는 서로를 존재하게 할 수 있는, 즉 서로의 존재에 간섭할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초월적 힘을 가진 상대로서 거듭나게 되었다. 서로가 상대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보전하기 위한 절절한 상호협박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축복해주지 않으면 기억해주지 않을 거야."

  "기억해주지 않으면 축복해주지 않을 거야."


  우리가 우리의 부모 세대와 늘 주고받던 갈등의 대화는 전부 이 표현들의 변주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러했듯이, 우리의 부모 세대 또한 그 윗 세대와 동일하게 반복해온 바로 그 갈등이다.


  이 영화에서는 이러한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하고자 하는 기획을 펼치고 있다.


  이를테면, 가족의 기준을 벗어나 자기실현을 꿈꾸는 이가 직면하는 가족과의 갈등의 문제는 어떻게 풀려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 해법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해법으로 안내하고 있는 핵심인물은 주인공인 소년과 그의 증조할머니인 코코다. 소년을 통해 자기실현과 가족이라는 두 가치 사이에서의 갈등은 촉발되며, 증조할머니인 코코를 통해 그 갈등은 통합된다.


  그 통합의 형태는 이러하다.


  사람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상실한 부모[조상]를 그리워하는 존재며, 부모[조상]가 하는 모든 일은 어떤 형식으로든 간에 전부 자식[후손]을 위해 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예술을 꿈꾸며 가족을 떠난 코코의 아버지도 코코를 위해 노래를 만들었던 것이고, 구두를 만들며 가족을 지킨 코코의 어머니도 코코를 위해 신발을 만들었다는 식이다.


  유전학은 이렇게 승리하며, 고대의 샤머니즘은 이렇게 복귀한다.


  이 영화는 이와 같은 가족지상주의를 모든 갈등의 통합적 해법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가족의 절대적인 목적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가족은 사랑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사랑의 종착점이다. 알파와 오메가다.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러나 분명, 이 자리에서 사랑은 축소되고, 환원되며, 거대한 자유의 날개를 잃는다.


  삶에 있어서의 절대화된 목적은 당위를 낳게 되며, 당위는 곧 윤리가 된다. 사랑은 이렇게 윤리로 변질된다. 윤리는 조건거래들의 명세서다. 그 조건이 단 하나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조건거래는 조건거래다. 그것이 무조건적인 것은 아니다.


  '가족끼리는 서로를 기억하고 사랑해야만 한다.'라는 명제로 성립되는 이 조건의 거래는 필연적으로 당위적인 의무로 작동하게 되며, 이처럼 사랑이 조건을 성립시키는 의무로 바뀌는 순간, 사랑은 그 자리에서 애착(attachment)이라는 이름의 아주 축소된 형태로 변질되게 된다.


  현대의 심리학은 그동안 우리가 심리학적 진실로 믿어왔던 애착이론의 허구 및 착각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핵심인 즉, 부모는 자식의 생물학적 필요조건이지만, 사랑의 필요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심리치료자가 부모의 역할을 대신 수행함으로써 건강한 애착을 형성하게 하려 했던 관점, 가족관계 특히 부모와의 관계를 회복해야만 개인이 건강해질 수 있다는 관점 등과 같은, 애착을 인간의 중심에 놓고 모든 것을 설명해왔던 관점들은 정말로 이제 낡은 것이 되었다.


  애착이론의 신화를 붕괴시키기 위해, 연구자들은 50여 년에 이르는 종단연구를 통해 부모가 절대적인 조건이 아님을 증명해오고 있다. 건강한 애착을 제공하는 조건이라고 가정되는 가족 구조 속에서 자라난 이들보다, 오히려 가족에게 유기되고, 고아로 자라난 이들이 심리적 성숙도가 훨씬 높게 드러나는 결과들은 동시대적으로 늘 새롭게 알려지고 있는 보고들이다.


  이러한 결과들은 실존심리학적 근거 속에서 이렇게 평가될 수 있는데, 요는 개인의 심리적 성숙도란 한 개인이 얼마나 자신의 존재감을 특정한 대상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성립시키냐의 문제이며, 오히려 애착관계에서 빨리 벗어난 이들일수록 조건적 의존에서 탈피해 스스로를 존립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아주 쉽게 얘기하자면, 이 세상에서 자신이 홀로 태어나, 홀로 죽어간다는 실존적 소여성을 자신의 삶으로서 정직하게 받아들인 이들만이, 즉 고독을 받아들인 이들만이, 심리적으로 성숙해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랑은 이 심리적 성숙도를 바탕으로서만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의존하는 이는, 즉 애착하는 이는 사랑할 여유가 없다. 애착이란 것은, 이 영화에서 코코를 통해 묘사되듯이, 인간은 아무리 늙어도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와 같다는 입장이다.


  즉, 애착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의 핵심은, 부모가 없는 결핍으로 살아가는 한 아이가, 또 다른 아이에게 부모의 역할을 하며 동일한 의존의 결핍을 전파하는 일이다. 부모 없이는 무력하기만 한 아이들만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이다. 이 연쇄는 위로도, 아래로도 끝없이 전개된다. 온 세상에 의존과 결핍만이 만연해지며, 그러한만큼 조건적 거래의 시도와 좌절 또한 함께 폭증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건강한 애착관계를 형성해줄 가족이란 것을 사랑의 원천으로 놓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즉, 사랑을 조건거래의 구조 속에 가두어 애착으로 변질시켰기 때문에 펼쳐지는 일들이다.


  그러나 사랑은 정말로 어떠한가. 우리가 늘 사랑에 감동받는 그 이유는, 사랑이 담고 있는 무조건성의 함의 때문이다.


  우리 존재가 그 어떤 거래를 성립시키지 않고서도, 그저 있는 그 자체로 사랑받을 수 있는 현실을 기술했던 철학자 틸리히가 말하듯이, 사랑의 위대함은, 그러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는 것이다.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사랑의 무조건성을 함의하는 가장 핵심적인 속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무조건성은 언제나 '그렇기 때문에'의 조건성을 넘어서 성립된다.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가족주의 및 혈족주의 이상의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무속신앙뿐 아니라 유전학 또한 넘어선다. 이 둘은 동종을 수호하는 논리인 까닭이며, 사랑의 무조건성은 동종(同種)을 넘어 이종(異種)을 지향하는 까닭이다.


  우리가 이 세상 그 누구와도 다르고, 심지어 우리의 가족과도 다른 이종이라는 사실이 있다. 이는 우리의 고유성을 의미한다. 동종이기 때문에, 즉 가족이기 때문에, 즉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조건을 성취했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이종으로서의 우리의 존재가 있는 그대로 수용될 수 있는 현실은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 현실, 바로 우리가 있는 그 자체로 사랑받는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늘 사랑이 궁금할 뿐이다.


  사랑이 언제나 동종의 '같음'을 넘어서 이종의 '다름'을 향해 나아가 그걸 품어내는 가장 거대한 품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 그 조건 없는 사랑의 품이 너무나 뼈에 사무치게 그리울 뿐이다. 삶에서 자신이 수용받기 위해서는 저승까지 찾아가 동종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동종의 축복을 받아내야만 하는, 즉 동종의 지지만이 유일한 존재의 근거가 되어 있는 이 현실이 서글플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직하게, 사랑이 애착으로 축소된 이 현실에서, 가족이 사랑의 유일한 원천이 된 이 현실에서 멈추고 싶어하지 않는다.


  가족은 사랑의 원천이 아니라, 사랑의 도구다. 사랑은 가족보다 크며, 애착보다 크다. 때문에 사랑은 가족에 선행한다. 사랑은 애착에 선행한다.


  이 애착에 선행하는 사랑이 어떻게 알려질 수 있는지는 지난 픽사의 작품들에서 잘 묘사되어 온 바 있다.


  그 어떤 조건 없이도, 이 세상에 그를 도울 가족이 없다 할지라도, 아무 혈연 없는 이종(異種)끼리의 이해와 수용, 그리고 연대를 통해 개인이 자신의 드넓은 자유를 살아가는 현실을 묘사하는 작업은, 늘 픽사의 전매특허였다.


  여기에는 늘 공통적인 함의가 내포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은 인간이 홀로 있는 고독의 체험 속에서 그 전모를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었다.


  상실은 우리가 근원적으로 혼자라는 사실을 실감시켜주며, 우리를 고독의 자리로 복귀시킨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역설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조우하게 된다. 스스로를 스스로로서 살리려 하는 그 삶의 실감을 경험하게 된다. 픽사의 작품들에는 사랑을 인도하는 이 위대한 상실의 정서가 담겨 있었다.


  상실과 그로 인한 고독을,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수용하는 이가, 스스로와 타자를 사랑할줄 아는 어른이 된다는 사실은 사랑에 대한 유일한 황금률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인 상실의 배경으로 놓인 죽음의 경계 자체를 모호하게 흐림으로써, 그렇게 우리가 홀로라는 사실을 흐림으로써, 사랑이 우리의 세계에 스스로 유입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해버렸다. 그리고는 그 사랑의 자리를 가족의 애착으로 대체해버렸다.


  종교가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핵심적인 전통이었다고 할 때, 종교성의 발전과정으로 이해하자면, 죽음과의 경계가 모호할수록 원시종교의 형태를 이룬다. 즉, 원시종교일수록 인간의 고독을 부정하려 하는 경향이 짙으며, 고등종교일수록 인간의 고독을 종교적 실재와의 조우를 안내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정초하는 경향이 짙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의 고유한 개체성에 대한 강조가 현대의 핵심정신이라고 할 때, 이 현대의 정신을 열어간 선구자인 키르케고르가, 인간의 고독이 자각되어야 할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은 고독함으로써만이 진정한 그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신 앞에 선 단독자'라는 개념을 제안했다는 사실은 분명 의미깊다.


  여기에서의, '신 앞에 선 단독자'는 곧 '죽음 앞에 선 단독자'라고도 할 수 있다. 자신이 언젠가 반드시 죽게 되며, 또 홀로 죽게 된다는 이 사실은, 우리의 유한성을 순식간에 자각시켜주며, 그 유한성으로 말미암아 지금 이 순간 절실하게 자신의 삶을 꽃피우고 싶은 삶에의 실감을 환기시켜준다.


  이는 곧, 내가 왜 이와 같은 고유한 형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그 의미를 꽃피우고 싶다는 뜨거운 인간의 선언이다. 그 의미를 기꺼이 자유롭게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며, 동시에 이것이 전술한 것처럼 현대의 핵심정신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러한 현대성의 요청을 오히려 근대 이전의 시대로 퇴행시키고 있다. 통합이라는 이름의 미분화인 것이다.


  인간이 고독할 수 있는 영광의 자리는 온기로 장식된 샤머니즘적 세계관의 요람이 되어 버렸고, 자기라는 이 우주의 거대한 신비를 드러낼 자유는 가족을 위한 봉사의 자유가 되어 버렸으며, 우리를 있는 그대로 온전하게 존재하게 할 사랑은 우리가 가족을 통해서만 건강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애착이 되어 버렸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위대한 그 모든 것이 환원되었다. 즉, 축소되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따듯하고 아름답지만, 좁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더욱이나 비좁은 집이다. 사랑은 물론 마굿간에서도 거하지만, 마굿간만이 사랑의 집은 분명 아니다. 실상 사랑이 마굿간에 오는 이유는, 그 마굿간의 지붕 아래만이 자기가 보호받고 안전할 수 있는 집인줄 알고 비루하게 살고 있는 우리를 데리고 나가기 위해서다. 이 하늘 아래 어디서든, 우리가 당당하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도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전하기 위해서다.


  하늘은 마굿간보다 크다. 마굿간이 무너져도 하늘은 남는다. 하늘이 먼저 있었던 까닭이다. 이처럼 마굿간이 포기되는 자리에서 원래 있었던 하늘이 만나질 수 있듯이, 애착이 포기되는 자리에서 원래 있었던 사랑이 드러날 수 있다. 사랑은 늘 애착보다 크며, 애착보다 선행한다. 그리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건 바로 그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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