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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Wonder, 2017) - 사실이 되고자 하는 용기

2020-03-27 01:08:48



  이 영화는 용기에 관한 영화입니다. 그것도 용기의 가장 심원한 차원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소년은 선천적인 장애 때문에 27번의 성형수술을 받게 되고,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남들과 다른 얼굴을 갖게 됩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누나는 이와 같은 그의 고유성을 중심에 두고 가정의 생태계를 형성합니다. 소년을 중심으로 운행되는 태양계와도 같습니다. 소년이 있는 이곳은 온기와 친밀감이 무한히 피어나는 따듯한 우주입니다.


  그리고 소년이 10살이 되었을 때, 소년은 그의 작은 우주를 떠나 더 넓은 외우주로, 학교라는 이름의 미지의 생태계로 모험을 떠나게 됩니다. 이 영화는 자못 낯설고 불친절한 그 미지의 외우주에서 소년이 어떠한 모험을 이루게 되는가를 그린 아름다운 무용담입니다.


  무용담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 영화는 영웅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소년이 자신의 신체적 장애를 치열하게 극복해가는 인내와 노력, 그리고 좌절의 아픔과 희망을 그린 영웅적 자전담이 아닙니다. 그리고 소년을 포함한 사건의 당사자들이 장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극복해가기 위해 펼쳐가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투쟁에 참여한 작은 소시민 영웅들의 오딧세이 또한 아닙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그와 같은 과잉과 작위를 최대한 배제하려고 합니다. 이는 정말로 이 영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용기의 가치를 그러한 영웅주의의 장막 아래 가려지게 하고 싶지 않은 까닭입니다.


  영화에서 소년은 결코 통속적인 의미로서의 피해자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즉, 피해자가 자신의 노력과 주변의 도움을 통해 종국에는 승리를 쟁취하게 되는, 즉 피해자가 영웅으로 변화되는 서사가 이 영화에서는 채택되고 있지 않습니다. 영화에서 소년을 피해자라고 얘기하려 한다면, 영화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들 또한 피해자라고 칭해져야 공정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소년의 누나가 소년에게 전하는 대사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너만 힘들다고 생각하지 마. 우리 모두가 실은 다 힘들어. 세상(학교)은 엿 같고, 사람들은 변해가니까."


  그렇게 이 영화는 단순히 한 소년만을 피해자로 가정해 모든 당위적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소년을 둘러싼 여러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갈등의 심정을 드러내는 섬세한 방식으로 사건을 기술함으로써, 우리가 정말로 초점을 맞춰야 할 핵심적인 지점으로 자연스럽게 우리의 시선을 수렴시켜 갑니다.


  그렇다면 그 핵심은 무엇일까요?


  사실은 변화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될 수 없는 사실에 친절해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용기의 가장 심원한 형태인 수용(acceptance)의 의미를 읽습니다. 용기를 강조한 실존신학자 폴 틸리히가 얘기했듯이, 모든 용기의 궁극적인 형태는 결국 있는 그대로의 자기 존재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수용의 용기입니다.


  사실을 수용하려 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억지로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많은 신화들에서 묘사되듯이, 이는 사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초자연적 영웅에 대한 꿈이며, 이른바 영웅적 용기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웅적 용기는 늘 변화에 행사할 수 있는 무리한 힘을 지향함으로써, 그 힘을 또 다른 폭력으로 작동시키거나, 충분한 힘을 갖추지 못한 무력함에 빠져 스스로를 비난하고 좌절시키곤 합니다.


  이러한 영웅적 용기 대신에 그 반대편에서 성립될 수 있는 자기 수용을 향한 용기를, 우리는 틸리히의 표현을 빌어 '존재하고자 하는 용기(courage to be)'라고 불러볼 수 있습니다. 이 존재하고자 하는 용기라는 것은, 자신을 임의대로 변화시키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고유하고 온전한 꼴로서, 스스로를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게 하겠다는 바로 그러한 용기입니다.


  즉, 존재하고자 하는 용기란 곧, 우리 자신을 변화될 수 없는 사실로 만들고자 하는 용기입니다. 이른바 사실이 되고자 하는 용기입니다. 변화될 수 없는 것은 견고합니다. 사실은 견고합니다. 그래서 사실이 되고자 하는 용기는,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가장 견고하고 강력한 긍정의 선언이 됩니다.


  이 영화에서 소년의 모험은 그 자신을 다른 존재로 바꾸려는 시도로 결코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모험은 결코 변화될 수 없는 사실로서 자신의 주어진 꼴 그 자체를 다른 생태계에 알리는 자기 표현의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소년은 사실이 되고자 하는 용기의 현현자로서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년의 모습은 강렬한 용기의 본으로 작동함으로써, 또 다른 용기들을 확산해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가 취약성으로 경험하고 있는 자신의 특성들이 있습니다. 약자에게 깊은 관심을 갖지만 정작 자신은 관심을 받지 못해 소외된 심정,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질투하는 심정, 외적으로는 누구에게나 친절하지만 뒤돌아서면 누구에 대해서라도 뒷얘기를 하게 되는 심정, 낯선 것이 두려운 까닭에 그 낯선 것을 혐오하려는 심정 등과 같이, 우리는 자신의 취약성으로 경험되는 이와 같은 내적 심정들이 노출되는 것을 수치스러워하며, 그러한 까닭에 자신과 외우주를 분리시킨 채 자신만의 은밀한 우주 안에서만 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들에게 소년의 모습은 뜨거운 울림을 줍니다. 소년은 외견적으로 너무나 명백해 보이는 취약성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낸 채, 그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우주에서 나와 더 넓은 외우주에서 자신의 존재를 당당한 사실로서 알리고 있는 용기의 증인으로서 묵묵히 드러나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처럼 사실이 되고자 하는 용기는, 곧 자신의 취약성을 정직하게 노출하고자 하는 용기입니다. 취약성에서 벗어나고자 다른 누군가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취약성을 사실로서 승인하여 그 사실 자체로서의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용기입니다. 우리가 노력을 통해 취약성을 극복한 자리에서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취약성 그 자체의 수용을 통해서만 고유한 우리 자신으로서 정당하게 존립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 실존철학에서 중요하게 탐구되어 온 주제입니다.


  소년은 우리에게 분명 가능할 수 있는 하나의 현실에 대한 산 증인입니다. 그 현실은 취약성을 수용함으로써 사실이 수용되고, 사실이 수용됨으로써 우리 자신의 견고한 존재감이 확보될 수 있는 그러한 현실입니다. 소년을 통해 우리 모두는 이러한 현실을 직감하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꼴로는 모자라고 형편없어 보이는 내 자신이라도 그 자체로 사랑받을 수 있는 현실이 정말로 존재하는걸까?"


  그리고 바로 그러한 현실을 향해, 각자가 자기만의 경계, 자기만의 우주에서 나와, 더 넓은 외우주로 모험의 발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사실이 되고자 하는, 우리 자신이 되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용기의 여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분명 위대한 전환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선의 전환입니다.


  이 전환은 영화 내에서 교장선생님의 다음과 같은 대사로 시사됩니다.


  "우리는 그 아이의 외모를 바꿀 수 없어요. 그렇다면 우리의 시선을 바꿔야죠."


  이와 같이, 다시 한 번, 우리는 사실을 바꿀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사실에 대한 친절한 시선을 드러낼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사실에 대한 친절한 시선은, 곧 우리 자신의 사실을 향한 친절한 시선이 됩니다. 그 시선을 통해 타인이 피어나고, 우리 자신이 피어납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서.


  사실이 시선을 견인하고, 사실을 보는 시선이 사실을 온전한 사실로서 정확하게 드러나게 해줍니다.


  그렇다면, 사실이 되고자 하는 용기는, 곧 사실을 보고자 하는 용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소년은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정말로 알고 싶다면, 당신이 할 일은 그저 바라보는 것이다(If you really want to see what people are, all you have to do is look)."


  어떤 사람이라는 존재를 안다는 것은, 곧 그 존재가 드러내고 있는 사실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실을 알고 싶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로서 정직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그 용기가, 사실을 사실로서 온전하게 되게 하고자 하는 그 용기가, 타인이 누구인지를 이 우주에 알리고, 동시에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 우주에 알립니다. 알려진다는 것은 곧 알고자 바라보는 시선에 포섭되어 수용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변화될 수 없는, 즉 그 무엇으로도 부정될 수 없는 사실을 그저 보고자 한 우리는, 어느덧 이 우주에서 그 무엇으로도 부정될 수 없는 사실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 어느 우주 속에서도 결코 부정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의 현실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용기로 열어낸 현실입니다. 기적(wonder)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갈 분명 그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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