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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스토리] 코엑스시사회

2020-03-31 05:10:26

허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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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때는 참 많이 다녔던 곳인데, 별마당 도서관이 들어오고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그때는 지하철에서 내려 메가박스까지가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번에 가보니 참 먼 길이었다.


메가박스 입구부터 시사회로 분주하다. 티켓부스에는 접근할 수 없이 무대가 만들어져 있고, 출연진뿐 아니라 동료배우들의 등장이 주된 무대를 이루고 있었다. 이름을 말해주기 전에는 누군지 알 수도 없는 배우들을 잠시 지켜본다. 고소영 정도는 이름 없이도 알아보았지만, 대부분은 이름을 말해주어도(!) 알 수 없는 이들이었다.


영화시작에 앞서 제작진과 주연배우들이 모두 들어와 영화에 관해, 이 자리에 와준 것에 대한 감사인사를 했다. 회사에서 마련해준 자리는 가장 좋은 좌석 중 하나였다.


하필. 위안부 관련 영화다. 알았으면 참석했을지가 불분명하다. 어디서 마음의 안위라도 얻어볼까 여기기웃 저기기웃 떠다니는 애처로운 현대인 중 한 사람이 몇 년 만에 혼자 나온 영화관 산책이 곧 벗기기 힘든 비극의 고통을 공유하는 참혹한 경험으로 바뀔 참이다.


그렇게 한심한 생각을 잠시 했더랬다. 누군가의 비극을 공감해 줄 만큼의 여유가 없다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


그 비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누구보다도 그 비극에 쉽사리 휘둘리고 심각한 심장의 상처를 실재로 입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역사책은 일제 침략 이후 부분을 한번도 제대로 공부해 본 적이 없다. 한 줄 문장을 읽으면 차오르는 눈물 덕에 더 이상 글자를 읽어나갈 수도 없던 오래전 기억. 친구들에게 언젠가 일본 천왕이 타살당했다는 소문을 들으면 내가 한 짓인 줄 알라며 심각하게 건내던 말들. 우리의 선조들이 당한 고통을 고스란히 나의 고통으로 느끼고 아파했던 기억. 누군가에게 보상을 용서를 받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보다 앞서, 내가 용서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뿐 아니라 그 시대를 겪지 않은 모든 후대들이 겪는 아픔, 그것 역시 용서를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왜 그 아픔을 배우고 숨죽여 울어야 하는가.


영화는 그렇게 비극을 잔잔히 담아낸다. 그들의 만행을 직접 눈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재판과정에서 증인의 입으로, 눈으로, 몸으로 담아낸다. 관부재판. 알지 못했음에 부끄러운 사건이다. 영화를 통해서나마 그 대기록을 알게 한 제작진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대배우들의 연기는.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실화라는 것을 믿기 어려울 만큼 엄청난 도전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무게있게 다가온 사실은, 재판을 하는 사람으로서, 원고들의 법률에도 근거하지 않은 주장을 일본재판부가 무려 6년간 23회의 변론기일을 거쳐 재판을 하였다는 사실이, 그리고 심지어 자신들의 職을 걸고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영화관을 나오면서도 그 밤 잠자리에 들어서도 도무지 떨쳐버리기 힘든 충격이요, 고민이었다. 나였다면, 그렇게 판단할 수 있었을까. 단지 '양심'에 기대어 법률에도 없고, 헌법에도 없는 '기본적 인권'을 가지고 같은 국민들로부터 최고 수준의 비난을 받을 것을 각오한 판결을 할 수 있었을까. 사실 그들은 '법적 근거가 없다'는 아주 간단한 이유만으로도 명쾌하게 재판을 마무리짓고 어느 누구로부터의 비난도 쉽사리 비켜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나 간단하고 편안한 길을 버릴만큼 판사로서의 직업적 양심이 강력했던 것일까. 그들의 판결은 결국 2, 3심에서 파기 확정되고, 그들은 경질된다.


적국의 판사들이다. 어째서 그들의 국가가 아직도 우리가 따라 가기 어려운 힘을 유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양심이 살아있는 재판을 한 이들. 재판을 거래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의혹으로 분란을 일으키고 있는 우리나라의 최고재판부가 더 없이 부끄러워지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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