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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 맨>15라운드 권투경기와도 같은 삶

2020-03-31 04:44:26

 

개인적으로 나는 이 영화의 포스터들 중에서, 복싱 경기장의 화려한 조명이 부각된 미국판 포스터보다 유난히 고독해보이는 주인공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우리나라판 포스터가 더 맘에 든다. 이 영화는 미국판 포스터 속 복싱 경기장의 모습처럼 화려한 성공담을 다룬 영화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스포트라이트가 잔뜩 비치는 영웅담보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판 포스터 속 주인공의 모습처럼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지독한 고독을 견뎌내고 싸워야 하는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특히나 좋았다. 어떻게 보면 실존인물, 특히 운동선수가 어려운 고난을 모두 헤치고 최고의 자리에 올라선다는 내용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오고 눈이 멀도록 많이 봐온 소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영화는 결과로 나오게 될 '화려한 성공'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그가 그런 화려한 성공을 거두기 전, 지독히도 힘들고 몇번이고 쓰러져야 정상일 만큼 모질었던 이전의 모습에 더 무게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삶의 고단함에서 오는 공감은 흔한 영웅담이 주는 감동보다 그 무게가 대단히 차이가 난다.

 

영화는 주인공의 눈부신 전성기로부터 시작된다. 이건 회상 장면도 아니고 미래를 상상하는 장면도 아니라, 현재 주인공이 처해 있는 현실이다. 그때만 해도 '불독' 제임스 브래독(러셀 크로우)는 남부러울 것 없이 승리 가도로 질주하던 최고의 라이트헤비급 복서였다. 한 경기때마다 수천달러는 너끈히 벌어내며 경제적으로도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얼마 후 순간의 자만과 실수로 인해 그는 끝도 없는 연패 행진으로 떨어지게 되고, 그의 예전 명성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게 된다. 더구나 때는 바야흐로 미국 최대의 경제 위기였던 대공황 시대. 하루하루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부인 매(르네 젤위거)를 비롯한 그의 가족의 경제사정은 끝간데를 모르는 듯 추락한다. 우유값마저도 제때 못내 못먹게 되고, 전기세도 자꾸 밀려 끊기는 게 오늘내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 복싱선수로의 길은 유지하고 있지만, 이제는 한 경기에 50달러도 벌까말까한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예전과는 너무 다른 실망스런 플레이를 보여준 제임스는 그만 복싱협회에서 제명당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에 처하고, 아이들은 친척 집에 보내야 될 상황에 처할 정도로 극도로 형편이 어려워진다. 그러던 중, 그의 매니저 조(폴 지아매티)의 노력으로 기적적으로 경기를 잡게 되지만, 이건 오직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한 마지막 한탕이었을 뿐, 재기전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기에서 기적적으로 상대편을 쓰러뜨린 제임스. 극도의 침체기에서 다시금 일어서 부활의 기미를 보이는 그의 모습에 이제 전미국이 열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승승장구 끝에 결국 선수 2명을 황천길로 보냈다는 악명높은 맥스 배어를 맞이하게 되는데...

 

사실 이 영화는 지극히 아카데미의 취향에 맞는 영화다. 실존인물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주연배우들도 만만치 않은 고생을 해야 하고, 시련을 딛고 일어서는 휴머니즘이 넘치는 인간승리 드라마이다. 사실 보면 뻔한 구석이 태반인 헐리웃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보는 사람의 가슴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쿵쾅거리게 하는 구석도 태반이다.

 

우선 배우들의 연기부터가 멋지다. 아카데미상에 빛나는 두 남녀 배우, 러셀 크로우와 르네 젤위거가 호흡을 맞춘 덕에 역시나 그들이 보여주는 연기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특히 러셀 크로우의 연기는 자신이 론 하워드에게 <뷰티풀 마인드> 때부터 직접 가서 영화화하자고 제의했을 만큼의 진심이 잔뜩 묻어나왔다. 한 끼도 먹을지 말지 고민일 만큼 힘든 가정 상황에서 가족들을 부양해나가야 하는 가장의 뚝심이, 그의 조용하지만 액센트가 강해보이는 말투, 언제나 주름이 져 있지만 미소 또한 쉽게 떠나지 않는 모습 속에서 그대로 우러나왔다. 진짜 복싱 선수인양 권투 경기 장면에서도 온몸을 아낌없이 던지는 장면은 어떻고. 물론 남녀 다른 성별끼리 구별하는 게 좀 형평성에 안맞긴 하지만,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힐러리 스웽크와 동등하게, 아니면 그 이상으로 배역에 몰입한 듯한 느낌이 역력했다.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이 배우는 이 역할이 정말 하고 싶었고, 그래서 정말 할 수 있는대로 열심히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를 만한 연기였다.

르네 젤위거의 연기 또한 멋졌다. 러셀 크로우에 비해 극을 이끌어나가는 비중은 많이 크지 않지만, 영화 속 지미 브래독의 부인인 매를 너무 튀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그 무게감이 버티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게끔 보여주었다. 생활력 강하고, 자신의 의견을 굽힐 줄 모르는 강단있는 여성이면서도, 남편이 그렇게 누구한테 맞는 모습을 눈뜨고 보지 못하는 연약한 심성 또한 갖고 있는 여성의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았나 싶다.

 

이 두 배우 말고도 칭찬을 아끼지 않고 싶은 배우가 있으니, 바로 매니저 조 역의 폴 지아매티이다. 사실 이 배우는 예전까지는 <빅 마마 하우스>나 <빅 팻 라이어>처럼 감초급으로 등장하는 코미디 배우인 줄 알았었지만, <사이드웨이> 이후로는 그런 배우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적당히 넉넉해보이는 외모에 걸맞게 그의 연기에는 후덕하고 여유로운, 줏대 있으면서도 인간적인 모습이 많이 배어 있었다. 코믹 연기로 보기 힘든 이 영화 속 조의 모습 또한 그랬다. 제임스와 그의 가족들을 마치 자기 가족처럼 생각할 줄 알고, 제임스에겐 둘도 없는 친구처럼 너그러운 사이이면서도 경기 중에는 끊임없이 악을 쓰며 제임스로 하여금 일관된 경기를 하도록 몰아붙이는 모습은, 러셀 크로우가 연기한 제임스 브래독 못지 않게 카리스마가 강하게 남는 인물이었다. 폴 지아매티는 그러한 역할을 두말할 나위없이 훌륭하게 보여주었고. 여기 또 한명의 코미디 출신의 멋드러지는 연기파 배우가 한창 재능을 피우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복싱 장면의 묘사 또한 생각보다 너무나 사실적이고 스릴이 넘쳤다. 중립된 샷을 잡다가도 누군가가 상대방에 펀치를 가할 순간이 오면 카메라는 클로즈업을 하면서 그들이 때리고 맞는 그 순간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음향 또한 '철퍽!'하는 소리가 그대로 귓전을 때리고, 맞는 순간 튀는 침, 피 등이 그대로 빛에 반사되어 보인다. 마치 떡방아라도 찧듯 글러브와 피부가 맞닿는 그 소리는 정말 질감이 착착 귀에 달라붙을 정도였다. 그렇게 사실적으로 눈과 귀를 자극하는 복싱 장면 덕분에 제임스 브래독의 승부에 더 간절히 응원하고, 아픔을 더 깊이 함께 느낄 수 있었지 않나 싶다.

 

이 영화가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어떻게 보면 막연하고 덧없을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충분히 믿고 싶게 만드는 따뜻한 희망이 영화 전반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박수까지 쳐가며 제임스 브래독도 그런 이유였다. 우리는 그를 마치 슈퍼맨이나 배트맨처럼 느끼면서 우리와는 거리가 먼 영웅처럼 여기며 대리만족을 느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쩌면 우리보다 더했을 아픈 가난과 생존의 문제가 정면으로 몸을 부딪쳐 왔고, 그 과정에서 쌓아 온 일종의 '깡'과 '끈기'를 경기를 통해 발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응원한 것이다. 그가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다름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와 똑같이 힘들었던 저런 사람들도 저런 동화같은 일을 맞이하는데, 거기다 실화라는데, 우리야 뭐 저런 일이 생기지 말란 법이 있으랴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제임스가 생계 삼아 하는 스포츠인 복싱은 어쩌면 우리의 삶과 다름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특히나 15라운드 이상이나 넘어가는 장기전이라면 더욱 더. 사실 우리 삶에 있어서 천하태평한 시기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적으며, 나머지는 끊임없이 다가오는 문제와 시련에 맞서 싸워야 하는 시기일 것이다. 그런 시련들은 언제 시작될지 모르고, 또 한번 시작되면 얼마나 시간을 끌고서야 끝날지 알 수 없다. 나를 괴롭히고 있는 시련이 나의 어떤 부위를 노리고 공격할지도 모르고. 그 속에서 우리는 누구의 도움없이 혼자서 링 위에 이미 올라선 복서처럼 중도포기 대신에 끝까지 이 악물고 싸워야 한다. 특히나 영화 속 제임스 브래독처럼 뒤에 누군가 나를 응원하고 나에게 기대는 사람들이 있다면 더욱 더. 물론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는 링 위, 세상 위에서는 '난 괜찮아요'하면서 웃어보여도 뒤로 돌아서서는 쓰디쓴 아픔을 꽉 깨문 이 사이로 씹어삼켜야 하는 고통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렇게 복싱과도 같은 고단한 삶을 그대로 냉소적으로 놔두지 않는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 고단한 삶은 언제든 딛고 올라설 만한 삶이 될 것이라고 얘기한다. 어떻게 보면 '또 지긋지긋한 가족주의인가?'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건 그저 진부하고 형식적인 가족주의가 아니다. 먹고 살아가기 위한 하루하루의 투쟁에서 나오는 인간의 당연한 심리일지도 모른다. 영화 속 제임스 브래독도 한순간 상대방의 공격에 다운돼 쓰러져 있는 순간에도 돈이 모자라 먹지 못하는 우유를 떠올리면서 다시금 일어선다. 돈을 충분히 벌어 아이들이 마음껏 우유도 먹으며 살 수 있다면, 아이들이 어린 나이에 가난이라는 걸 몸으로 느끼지 않고 그 밝은 미소만 언제나 보여줄 수 있다면, 아버지로서 슈퍼맨처럼 하늘을 나는 일까지도 기꺼이 할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이 분명 이럴 것이고, 나아가 우리 모두의 마음이 이럴 것이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내일 하루도 무사히 아무 불편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그런 마음. 그런 마음이 제임스 브래독으로 하여금 '신데렐라 맨'이 되게 한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그 어떤 고도의 훈련이나 균형잡힌 영양섭취보다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뭐라도 해주고 싶은 그런 순수하고 착한 마음이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제임스 브래독의 처지로 봤을 때, 이 영화는 지금도 우리 대신에 세상이라는 링에 나가서 홀로 15라운드짜리 싸움을 이어가고 있을 세상의 아버지들을 위한 영화가 될 수 있겠지만, 넓게 봐서는 우리 모두를 위한 영화일 것이다. 지금 어리더라도, 언젠가는 어른이 되고, 언젠가는 내가 보살펴야 할 사람들이 생기고, 그렇게 되면 언제라도 나 또한 링에 나가 외로이 싸우는 복서가 될 수 있다. 그때는 제임스처럼 우리도 참을 수 없을 만큼 힘들기도 하겠지. 그러나 이 영화는 걱정 말라면서, 우리 뒤에는 언제나 우리를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어깨를 주물러줄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고 격려한다. 그들의 그런 관심이 뒤에서 매니저마냥 버티고 있다면, 그 어떤 맥스 배어같은 강력한 상대도 두렵지 않을 것이라고. 내가 우리나라판 포스터가 더 맘에 드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제임스의 모습은 분명 고독하지만, 그의 옆에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가득찬, 그가 사랑하는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건 그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있는 경기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경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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