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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치매를 신파 감성에 기대지 않고도 담담하게 풀어낼 줄 안다 - 로망

2020-03-30 02:59:38

로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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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소재의 드라마가 너무 남발되고 있어서 [로망]의 예상 가능한 치매 설정은 궁금하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그려질지 그림이 잡혔다. 영화에서 보기 힘든 정영숙의 주인공 연기가 궁금해서 봤다. 연극 쪽에선 이미 치매를 주 소재로 한 일명 효도 공연이자 시니어물이 정착해서 수시로 부모 세대를 대상으로 한 소극장용 작품들이 개발되고 있다. 영화를 각색한 [장수상회]도 재공연에 이르면서 레파토리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고 [사랑해요, 당신]같은 작품도 텔레비전 드라마로 익숙한 기성 배우들을 적극 활용하여 재공연을 성공시켰다. 두 작품 다 대학로 소극장 연극이고 나이 든 부부의 이야기이며 노인 치매를 풀어낸 작품이다.

 

대학로 등지에서 공연된 연극 [사랑해요, 당신]은 2017년 4월 4일부터 5월 28일까지 대학로 예그린씨어터에서 초연한 작품으로 같은 해 9월 29일부터 10월 29일까지 같은 극장에서 연장 공연까지 성공시켰다. 그리고 2018년 4월 28일부터 6월 3일까지 KT&G 상상마당 대치아트홀에서 재공연에 들어가면서 2017년 대학로 초연 때 그랬던 것처럼 다시 전국 공연지를 순회중이다. 연극 [사랑해요, 당신]도 [로망]처럼 노인 부부의 이야기에서 치매를 전면에 부각시킨 작품이다. 배역 설정과 치매 소재에 따른 신파 감성도 효심을 자극하며 찌른다. 이 작품 초연과 재연의 남녀주인공에 더블캐스팅으로 이순재와 정영숙이 나온다.

 

처음에 [로망]의 개봉 소식을 접했을 때는 2017년부터 공연된 연극 [사랑해요, 당신]의 각색물이거나 실황물이 나온건줄 알았다. 배우와 소재가 완전히 겹치는데다 매체 노출도 적극적이었던 [사랑해요, 당신]과 혼동할 여지가 많았다. 이순재나 정영숙이나 고령의 원로 배우들이고 대중적으로 이름이 잘 알려진 나이 든 현역 배우층이 얇기 때문에 두 배우가 비슷한 시기에 기시감을 일으키는 작품에 동반 출연하는 행보를 예외의 경우로 넘기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배우의 경력과 존경 받는 이력, 신뢰를 주는 연기력으로 유사한 작품에 연속으로 출연하는 것에서 받는 우려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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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재는 80줄의 고령에서도 다작이고 최근 출연한 대학로 효도 공연들에서 연달아 치매 노인 역을 맡았기 때문에 영화에서까지 치매 질환을 겪는 괴팍한 우리네 아버지상을 보여주는 것에 배역 구분이 어려울 정도긴 하다. 배우 나이에 따른 선택의 폭이 좁아진만큼 드라마나 연극과 달리 영화에서는 치매 노인 주인공을 맡은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 나름대로 의미 있는 선택이라고 본다. 이순재 본인도 저예산에 출연로도 평상시 받는 것보다 훨씬 적었던 [로망]의 출연 계기로 영화를 들었다.   

 

치매 설정이 이야기 소재로 워낙에 흔해서 보기도 전부터 지치는 감이 있다. [로망]은 부부 치매로 자주 우려먹는 치매 소재에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고령화 사회이기 때문에 부부 공동 치매는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다. 현실적 고민으로 노인 치매를 풀어내 공감대를 형성시킨다. [장수상회]같은 외화 리메이크까지 치매를 전면에 내세우는 작품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을 보면 그만큼 치매라는 통제 불능의 불치병이 우리 모두에게 노출된 치명적인 질병이기 때문일 것이다.

 

부부 공동 치매를 다루고 있는 [로망]은 아내에게 먼저 치매가 온다. 아내의 치매가 요양원에 입원시켜야 할만큼 심각해진 뒤에 남자에게도 치매가 발병한다. 부부 공동 치매에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장수상회]처럼 부부가 같은 요양원이건 다른 요양원이건 시설에 장기 입원하여 여생을 마무리 하는 것이다. [장수상회]는 부부가 같은 요양원에 입원한 것으로 마무리 지었고 [노트북]은 이미 치매로 요양원에 입원한 아내를 보살피는 남자의 현실에서 극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회상 구조로 넘어간다.

 

[로망]은 비슷한 시기에 부부에게 치매가 찾아오지만 여자 쪽이 앓고 있는 치매는 중증이고 남자 쪽은 경증이다. 부부는 오락가락해진 기억과 현실 감각에서 함께 거주하며 [메멘토]나 시간여행 멜로물처럼 정신이 되돌아 올 때마다 서로에 대한 기억을 되짚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시어머니의 치매 증상에 질려버린 며느리가 친정으로 도피하고 철없는 룸펜 아들도 며느리에게 보낸 뒤 부부만 남은 극 중반부터는 2인극이 되는데 예상 가능한 전개에서도 흥미로운 긴장감으로 전개돼서 의외로 무료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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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예산 영화의 한계로 많은 인력을 쓸 수 없었을테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 주로 실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리게 됐는데 이런 부분이 극의 몰입에 효과적이다. 때론 예산이 주는 한계가 의도한 것 이상의 효과를 자아낼 때가 있는데 [로망]의 경우도 예산의 압박으로 우회한 방법들이 노인 부부 공동 치매의 문제를 드라마틱한 감정으로 풀어내는데 도움을 준것 같다. 거의 실내 2인극이 되면서 배역에 집중할 수 있게 됐고 자식이나 주변의 시선에서 치매 노인이 비춰지는 여타의 작품들과 달리 치매를 겪는 노인의 주관적 시선에서 치매가 주는 공포와 상실감을 그려내 배역의 감정이입 면에서 새로운 긴장감이 생긴다. 부부는 기억이 돌아올 때마다 서로를 확인할 수 있는 메모를 수시로 남겨 집안 곳곳에 붙여 둔다. 기억이 돌아오면 현실에 비관하여 자살 시도를 하기도 하고 평상시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해가며 남은 생,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시간을 소중하게 활용한다.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오는 감각 기관의 회복 속도가 불안전하게 돌아가는 치매를 시간여행 설정의 애틋한 멜로물처럼 활용한 방식이 효과적이다. 연출보다는 연기에 빚진 작품이지만 드라마를 통제하는 방식도 보기보다 투박하지 않다. 아들 내외가 떨어져 나간 중반 이후부터의 사실상 2인극 전개는 연출력과 연기력이 고르게 합쳐진 결과다. 이순재가 자주 맡는 괴팍한 한국 아버지상과 순종적인 아내, 결코 이겨낼 수 없는 아픈 기억 등 노인 부부 주인공을 그릴 때 써먹을 수 있는 전형적인 설정과 상투적인 흐름을 이겨내지는 못했지만 부부 공동 치매를 겪는 서민 부부의 이야기를 신파 감성에 기대지 않고 담담하게 풀어낸 전개에서 차분하게 적시는 힘이 있다. 다시 돌아온 현실 감각으로 아내와 동반 자살을 시도하다가 아내가 해변가에 앉아 노환에 의한 자연사로 먼저 가는 마무리도 짙은 여운을 남긴다.

 

배우들의 호연도 눈부시다. 다작에 치매 겪는 노인 역을 너무 많이 한 이순재보다는 정영숙의 연기가 더 눈에 띄는건 어쩔 수 없다. 원로 배우에 대한 예의를 떠나서 배역의 표현력도 선명하고 영화도 무난해서 여우주연상 후보로 올라가도 좋을 것 같다. 저예산 영화다 보니 조한철과 [용팔이]이후 영화, 드라마에 부지런히 출연하고 있는 배해선이 이만한 크기의 배역을 맡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둘 다 좋았다. 이순재의 젊은 시절 모습으로 특별 출연한 진선규가 이순재의 외양적 특징을 잡아내 연기한 것도 인상적이다.

 

정영숙은 처음 출연 제안을 받고 2년만에 이 작품을 찍을 수 있었다. 이순재도 영화 주인공이라는 것에 끌려 적은 출연료를 감수했다. 예산 문제로 난항을 겪었던 영화 [로망]은 지역 mbc에선 최초로 영화에 투자한 작품이다. 충북mbc가 공동 제작으로 이름을 올렸고 영상문화도시를 지향하는 청주의 청주영상위원회에서 영상콘텐츠 제작 지원 선정작으로 뽑아 청주에서 로케이션을 지원한 작품이다. 2018년 7월 23일부터 8월 22일까지 한달간의 짧은 일정 속에서 촬영을 완료했다. 지역 예산이 들어간 작품답게 무심천, 청주동물원 등 청주의 곳곳과 충북 일대를 담아 지역 홍보물의 역할도 해냈다. 영화가 시작되면 mbc충북 타이틀이 강조되어 있기도 하지만 촬영지로 선호되지 않는 청주가 배경이라서 지역 예산의 흔적을 눈치챌 수 있다. 영화 배경지로는 잘 볼 수 없는 청주에서 대부분 촬영한 작품이라 로케이션물의 신선함과 호기심을 충족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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