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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불패

2020-03-31 05:02:33

<들어가기>
영화는 관리를 죽이는 일본인 무사와 관원 중 우두머리의 목을 취하는 동방불패의 화려한 무공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억새를 밟고 달리고, 하늘을 날고, 검기를 내뿜는다. 이들을 고수(高手)라 칭한다. 현실 속의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이들의 이야기이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는 신화(神話)와도 닮아있다. 신화에는 원형적인 꿈이 담겨 있고, 여기 고수들은 강호라는 세계에서의 모험을 통해 그것을 이야기한다.

 

동방불패가 반란을 준비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는 한 손에 일월신교의 부채를 들고 한 손에 관리의 머리를 들고 지붕 끝에서 우아한 자세로 서 있다. 한편, 또 다른 주인공 임호충은 그의 사매와 함께 말을 타고 달린다. 그는 술을 마시며 말을 탄다. 강호를 떠나기로 한 그들은 우배산을 향하고 있다. 두 주인공은 서로 다른 길을 향하고 있다. 한 쪽은 관리의 머리를 들고, 천하를 꿈꾸고 있고 한 쪽은 말의 죽음을 달래며 강호를 떠나 산 속에 숨을 것을 꿈꾼다. 이쯤에서 이 영화가 두 고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서로 다른.

두 주인공이 서로 다른 길을 가는 것처럼 이 영화의 세계는 이원화되어 있다. 독존과 공존, 묘족과 한족, 강호제패와 소오강호, 적과 친구, 선과 악, 남과 여, 진실과 미혹. 그러나 임호충과 동방불패의 여행을 따라가는 영화는 이 세계에서의 탈출을 꿈꾼다. 그것은 소오강호笑傲江湖라는 이 영화의 주제의식과도 닮아있다. 강호를 비웃다. 좁은 범위에서 소오강호는 강호를 떠나려는 이들의 마음을 담고 있지만 더 넓게 해석하면 강호는 이원화된 이 세계를 뜻하고 그를 비웃음은 세계의 탈출이고, 더 높은 삶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이다.

 

 

<두 영웅의 세계>
월영영의 채찍을 발견한 임호충은 우배산으로 가던 길을 고쳐서 월영영을 찾으러 간다. 여기서부터 그와 동방불패의 만남은 시작된다. 말을 타고 가던 그는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지고 새가 떨어지는 기이한 현상을 보고 그 기운을 쫓아간다. 그리고 그 곳에서 동방불패와 만나고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이 때 동방불패는 신격화된 인물로 그려진다. 그가 가진 무공을 표현함에 있어서도 첫 등장 때와는 다르다. 빠르고 역동적인 경공에 의존한 것이 아니다. 느린 움직임과 작은 몸짓만으로 바람을 일으키고 그가 날리는 물방울들은 나뭇잎을 뚫고 나무껍질을 부순다. 그리고 임호충과 대화할 때 목소리를 울리는 전음을 사용함으로써 신적인 분위기를 더욱 강화시킨다. 물속에서 몸을 일으키는 장면은 물 속에서 용이 등장하는 것과 같이 느껴진다. (뒷부분에서 동방불패가 놓고 있던 자수 역시 용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여성적 면모와 남성적 면모를 두루 갖추고 있다. 그가 물에 젖은 몸으로 술을 마시는 부분은 여성적 이미지가 강조되어 관능적으로 여겨지고 이 모습에 임호충 또한 반하게 되는데 이것은 양성적으로 드러나는 동방불패의 캐릭터를 잘 보여준다. 이는 신화의 세계에서 생소한 것이 아니다. 불교신화의 보살이, 중국 신화에서 중국 역사의 시원인 성녀 타이유완(太元)이 그러하다.

이 신격화된 영웅은 꿈을 꾸고 있다. 천하를 제패해 묘족을 한족 위에 두겠다는 꿈을 꾼다. 그를 위해 괴화보전을 취하고 교주를 가두었으며 남성을 거세하면서까지 능력을 얻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과 주변을 파괴하고 독존을 택했고, 까닭에 그는 흔들린다. 달이 아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하나에 집착하는 것과 같다. 괴화보전을 통한 꿈이 그의 진리가 아니라, 마치 괴화보전이 그의 진리인양 괴화보전을 보고 싶어하는 자를 서슴없이 죽이고, 아무도 믿지 못한다. 자신과 함께 일하기로 한 무사가 괴화보전을 보고 싶어 침실에 침입하자 그는 가차없이 그를 죽인다. 무사가 쓰러진 자리에는 피로 가득한 구덩이만이 비춰진다. 그리고 그는 고독해진다. 그는 말한다. “나는 백성들을 위해 애쓰는데 누가 내 마음을 알겠느냐, 오히려 날 저주할 것이다.” 그나마 가까이 두고 있는 시시에게도 자신의 남성이 사라져감에 따라 애정을 보이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향기롭고 독한 술 한 모금에 온 몸으로 기뻐하던 임호충을 떠올린다. 임호충에게서 삶의 순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호방함이 느껴져서일까. 임호충은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 보인다.

 

임호충 역시 꿈을 꾸고 있다. 강호를 떠나는. 그러나 그는 너무 쉽게 그 꿈을 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월영영의 위험을 인지하고 그녀를 찾으러 가고, 그녀의 아버지가 실종된 것에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래서 사제들과의 약속, 강호를 떠나겠다는 꿈을 잠시 접고 월불행을 찾으러 간다. 그러나 이것이 임호충의 미덕이다. 그는 자신의 소망의 근본을 알고 있다. 그는 괴화보전을 위해 제자마저 죽이려 했던 사부처럼 강호의 인의가 사라짐에 등을 돌리려는 것이지 자신이 강호를 떠나기 위해 가까운 이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독고구검이라는 절세무공을 갖고 있지만 단 한번도 살생을 저지르지 않는다. 상대가 여자일 경우 항상 출수한 검을 접기에 바쁘고, 상문천과의 대결에서도 모자를 벗기는 순간 검을 회수한다. 또 월불행을 찾으러 동방불패의 집을 습격했을 때도 혈도를 찍는 것 이외에 살생을 하지 않는다. 그의 검과 길 뒤에는 항상 공존에 대한 의지와 삶에 대한 따뜻한 긍정이 배어있다.

 

 

<무너지는 세계>
월불행을 찾으러 간 임호충은 동방불패를 만난다. 동방불패가 날린 호롱불은 꺼지지 않은 채 임호충의 칼끝에서 놀고, 다시 날아갔을 때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다. 동방불패 공력을 실어 날린 바늘끝을 멈추기 위해 자신이 놓던 자수를 날린다. 임호충은 실수로 동방불패의 용 자수를 찢고, 연이어 나타난 자객들을 피하기 위해 동방불패를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 안개가 자욱한 숲을 지나 달빛을 즐기는 두 사람.

동방불패는 임호충을 통해 다시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자신은 묘족을 위한다는 명분을 갖고 자신마저 파괴해 버렸지만 실은 권력을 쫓고 있을 뿐이다. 주위에는 괴화보전을 노리는 사람들과 자신을 암살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해 믿을 사람도 없다. 임호충은 말한다. “낭자는 내 말을 평생 모를 수도 있다. 그러니 원한이 없다.” 동방불패는 피리를 분다. 임호충이 시를 읊는다. “권력을 쫓아 세월을 보내니, 인생의 참뜻을 잊게 되었다.” 과연 언제 동방불패가 아무 원한 없이 새벽의 숲 사이를 유영할 수 있을까, 달빛을 즐기며 삶을 돌아보게 되었을까.
우연히 임호충이 찢은 용 자수 역시 그런 점에서 상징적이다. 동방불패의 권력욕망을 임호충이 제지하게 만들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동방불패는 뻔히 자신을 방해하러 온 임호충을 죽일 수 있음에도 살려둔다. 이로써 임호충은 우배산으로 가던 길을 꺾어 모험의 중심부로 뛰어들게 되고, 동방불패는 독존과 한인에 대한 복수심에 대한 자신의 원칙을 깬다. 서로 다른 두 영웅의 아름다운 달빛 산책은 관객으로 하여금 아름다움과 따뜻한 환상을 갖게 함과 동시에 파국에의 불안감을 감지하게 한다.

 

그때, 동방불패의 호위무사가 나타난다. 임호충이 그를 상대하려하자, 동방불패는 임호충을 기절시켜 감옥에 가둔다. 그러나 임호충은 기지로 감옥을 탈출하고 월불행을 구해낸다. 그러나 월불행은 복수심에 눈이 멀어 잔인하게 흡성대법을 사용한다. 그리고 임호충에게 함께 악을 없애고 천하를 공유하자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임호충은 단호히 거절한다. 그리고 자신의 무공을 잃더라도 강호를 떠나겠다고 이야기한다.

 

관객은 이 쯤에서 혼란을 겪는다. 월불행의 등장으로 선악의 경계가 깨어진다. 전형적인 선악구도라면 임호충이 구해 낸 월불행은 임호충과 함께 선의 입장에서 서서 동방불패를 없애야 하는데 그는 선인이라서 동방불패를 없애려 한다기보다는 복수심에 불타고 권력욕에 불타는 사람에 불과하다. 이로 인해 동방불패에 대한 악인으로써의 인식도 어느 정도 희석되고 만다. 깨어진 선악구도 가운데, 적과 친구의 경계도 모호해진다. 또한, 괴화보전을 찾기 위해 탐욕에 찬 월불행의 모습에서 괴화보전은 진리도, 그 어떤 것도 아님을 느낀다. 임호충은 무공을 잃더라도 강호를 떠나겠다는 말을 월불행의 신의에 기대어 이야기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그 이야기는 무모해보인다. 그것은 소오강호도, 강호제패도 아닌 목숨을 부질없이 버리는 행위로 보이는 것이다. 이제 모험은 두 영웅의 만남을 지나, 무너지는 세계의 끝으로 간다. 이렇게 해서 영화는, 모험은 긴박감을 더 해가고, 파국으로 나아간다.

 

자신의 무공을 없애려는 월불행의 손에서 월영영의 도움으로 풀려난 임호충은 이런 때 술이 없다 하며 외로운 마음에 동방불패를 찾아간다. 한편, 동방불패는 자신의 여성성이 강화됨을 괴화보전 탓으로 돌리고 이를 없애려고 하는 시시마저 믿지 못하게 되고, 월불행 일당을 죽이러 가려던 차에 임호충을 다시 만난다. 그리고 시시에게 임호충과 밤을 보내어 자신을 영원히 기억하라 하고 자신은 결투의 장으로 간다.


여기서 영화는 극단적인 두 장면을 교차시키면서 아수라장을 보여준다. 임호충은 에로스의 쾌락, 삶의 기쁨을 맛보고 있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와 함께 하는 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그의 부재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 동방불패는 자신의 과업을 위해 월불행 주변의 인물들을 모두 죽이고 있지만 한편으로 임호충을 자꾸 떠올리게 되고, 그가 저지르는 일들이 가져올 파행-임호충의 칼끝이 자신을 향하게 될-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 시시를 통해 임호충이 자신을 영원히 기억케 하리라 생각하지만 그것 역시 진실이 되지 못한다.


이 장면들은 이 세계에서 개개인이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잘 보여준다. 애초에 괴화보전으로 비롯된 암투, 묘족과 한족의 대립, 적 아니면 친구, 삶 아니면 죽음이었던 강호의 삶이다. 월불행의 눈에는 복수만이 보이고, 동방불패의 눈에는 모두가 적으로 보인다. 비록 임호충의 사제들이 강호에 관심이 없고, 칼로 음식을 만들어먹던 간에 칼을 든 한족이고 월불행과 함께 있던 이들은 모두 동방불패의 적이다. 그리고 단 일합에 오리를 제외한 모든 사제들은 죽음으로 이어진다. 단지 임호충만이 이 결전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경계에 선 애매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반대선상에 있는 사람임을 알면서도 임호충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동방불패는 그를 이 싸움에서 배제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동방불패와 임호충의 차이로 비극을 초래한다. 동방불패는 독존하려는 인물이고, 임호충은 사람들과 공존하려는 인물이다. 돌아온 임호충은 사제들의 시체를 보고 절규한다.

 

 

<세계에서의 탈출>
괴화보전을 태우는 월불행은 이야기한다. 누구든 원한이 있으면 강호고, 강호가 곧 인간이다. 어떻게 강호를 떠나겠느냐, 라고. 임호충은 칼을 다시 뽑아든다. 복수를 마음먹은 것이다. 그리고 임호충, 월불행, 월영영과 오리는 동방불패가 있는 흑모야로 가서 마지막 싸움을 벌이게 된다.

동방불패와 만난 임호충은 자신이 알고 있던 시시가 동방불패였음에 놀라며, 그날 밤에 자신과 있던 것이 동방불패냐고 묻는다. 이에 동방불패는 답하지 않고 일전을 벌이나, 임호충이 상처입는 것에 마음이 흩어진 그는 임호충의 칼에 당하고 만다. 그리고 두 여자(사매와 월영영)와 자신 중에 누구를 구하는지 보겠다면서 그들과 함께 절벽으로 뛰어드나 임호충은 셋 다 구한다. 그러나 동방불패는 끝까지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임호충을 밀어내고 혼자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복수에 성공한 월불행은 제 2의 동방불패가 되어 폭정을 시작하고 임호충과 오리는 함께 갈 수 없어도 신의를 지킨 월영영과 의를 위해 자신의 팔을 베어버리는 상문천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떠나간다.

 

동방불패는 임호충과의 첫 만남 이전까지만 해도 전음을 사용하고 압도적인 무공을 보여주는 신격화된 영웅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앞서 살폈듯이, 그는 달이 아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착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흔들린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괴화보전의 이 영화에서의 역할이다. 괴화보전은 많은 고수들의 마음을 빼앗고 암투를 벌이게 만드는 근본 원인을 제공했지만 실제 이야기의 진행에서는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일종의 맥거핀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동방불패와 임호충을 둘러싼 모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가 가진 가치관이고, 그에 따라 움직이는 곳, 그 곳이 강호임을 보여주고 있다. 괴화보전은 진리(무공을 위한)로 보여지지만 실제는 허상인 셈이다.
그래서 동방불패는 임호충을 만나면서 변화한다. 인간은 신의가 없다고 말하는 그가 임호충에게 “내가 너를 여러 번 살려줬는데 이럴 수 있냐?”고 반문하는 마지막 대목은 역설적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임호충에게 신의를 갖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임호충에게 신의를 가지는 순간 양성성을 지녔던 그의 모습은 여성쪽으로 기울어가기 시작한다. 임호충에게 보이는 신의는 임호충의 모습에서 얻어낸 깨달음과도 통하고 있다. 홀로 외롭게 묘족의 반란을 일으키는 그가 소오강호를 부르고, 권력의 부질없음을 읊는 호방한 영웅 임호충에게 동화되고 있는 셈이다.


결국 키워드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강호에서 누구에게 믿음을 주느냐였던 셈이다. 따라서 전음을 사용하던 그의 목소리는 여성으로 변해가고, 막바지까지 그 목소리는 변하지 않는다. 화장을 하는 것 또한 상징적인데, 여전히 묘족의 반란이라든가 강호의 암투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임호충에게의 호감처럼 변화하고 싶은 욕망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것은 동방불패의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친다. 자신이 가는 길과, 현재 자신의 감정이 모순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마지막 싸움에서도 월불행 일행이 닥치자 불덩이가 담긴 솥을 그들에게 날리고 그들이 상대하는 동안 동방불패는 임호충의 시를 읊는다. “권력을 쫓아 세월을 보내니, 인생의 참뜻을 잊게 되었다.” 행동과 달리 동방불패는 그 순간에도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파장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절벽에서 월영영과 사매를 구출한 그가 동방불패마저 구해내자 그에게 말한다.
“인간이란 신의를 모르는데 왜 날 구하느냐.”
그러자 임호충은 그날 밤에 함께 있었던 사람이 동방불패였는지 물어본다. 동방불패는 끝까지 신의를 묻고 진심으로 대하는 그를 밀쳐내고 절벽으로 몸을 던진다. 절벽에 떨어지는 동방불패는 애잔함을 남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그러하고, 이루어지지 못한 용의 꿈이 그러하다. 물속에서 몸을 일으키고 자연을 다스리던 절세무공의 그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장면은 승천하지 못한 용이 추락하는 그것과 닮아있다.


그 때, 동방불패는 자신의 행동들이 부질없음을, 강호제패의 꿈이 부질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자신을 파괴하면서까지 선택한 괴화보전을 통해 진리에 이르지도, 꿈을 이루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강호에 살 수도 떠날 수도 없는 덧없는 인생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음을 택했다고는 하나, 죽었다고 볼 수 없다. 영화는 그의 시신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의 무공으로 보아 쉽게 죽었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그것은 강호인으로서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는 소오강호의 깨달음을 얻었고, 소오강호의 세계로 사라진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강호에서의 탈출은 임호충과 이루어질 수 없었지만 같은 길을 가게 된다는 점에서 그들 만남의 신화적 의미가 표출된다.

 

 

<나가기>
그렇다면 진정한 소오강호는, 영웅은 임호충과 동방불패라고 할 수 있겠다. 많은 사람들이 고수들이 소오강호를 꿈꾸지만 그 길은 좁고 험하다. 소오강호는 인생의 무상함, 강호의 허상에 관한 내면적 깨달음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그를 위해 시련을 겪어야 하고 그 끝에 얻어내는 자가 적다는 것은 신화적 메시지라고 볼 수 있다. 소오강호를 부르고 싶어한 사람들은 많았으나, 그 근본인 인간에 대한 신의보다 탈출이 앞섰던 그의 사제들-그들은 도움주기를 회피하려 한다.-이나 일월신교의 일원으로써의 정체성을 버리지 못하는 월영영과 상문천은 강호를 떠나지 못했다. 월불행은 아예 강호를 버리지 못한다고, 원한을 이야기하고 끝까지 복수로 일관한다.


그리고 이 영화가 가지는 미덕은 자칫 소오강호라는 주제적 모티프가 극단적 허무주의로 흐를 수 있을 만한 것을, 강호인의 신의와 복수, 사랑과 함께 이야기함으로써 공존의 삶이라는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임호충을 통해 동방불패가 변화하고 관객은 그 영웅의 깊이를 느끼게 된다. 더불어 극단적으로 강호의 이상을 추구했던 동방불패가 반대편에 서 있던 임호충에게 동화되어가는 과정은 주제의식을 표출해내는데 가장 적합한 인물 설정이었다고 여겨진다.

 

바다에 파도는 몰아치고
배는 물살에 끌려 떠도네
인생에 고난은 많고 많지만
시간이 흐르며 잊혀지네.

 

강호는, 세계는 한 번 빠지면 그 속박에서 헤어날 수 없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세월이 지나면서 인생의 참뜻을 잊게 만드는 것. 그러나 그 속에서 참된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영화, <동방불패>이다. 다시, 신화를 말한다. 신화라는 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해온 진리에 대한 모색, 의미에 대한 모색을 뼈대로 하는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인간 삶의 의미를 찾게 해 주는 이야기인 셈이다. 그리고 그 주제는 시공을 초월한 테마이다. 이 영화는 강호라는 세계와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신화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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