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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센테니얼 맨>늘 그렇듯이 다시 보면 더 많은 ...

2020-03-30 03:01:00

책을 다시 보면 그렇듯이 영화도 다시 보면 더 많은 걸 얻게 된다. 인류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지만 예전에 봤을 때와 다르게 매우 현실적인 영화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유일무이하게 존재하는 모든 생의 근원적 질문에 대한 대답의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1920년 사회주의 혁명 기운이 가득했던 체코에서 로봇을 상상해 냈다는 점에서도, 인류를 향한 실존적 질문에서 출발한 영화라고 본다.

 

체코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가 자신의 희곡에 불평등한 강제노동의 문제를 다루면서 주인을 공격하는 인조인간 로봇을 등장시키고 체코어로 강제노동을 뜻하는 로보타(robota)에서 a만 떼어내서 이름을 붙였던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서로의 관계가 불평등할 때의 고통은 인류가 해결해야 할 핵심적 문제다. 또한 지금 한국사회에 급속히 확대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실존적 고민이기도 하다.

 

제작 과정의 실수로 지능과 호기심을 지니게 된 가사로봇 앤드류는 가사도우미를 하면서 주인의 허락대로 짬짬이 책을 읽는다. 모든 인간이 책을 읽으면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듯 앤드류도 자유를 원하게 되었으니 로봇도 인간도 커다란 문제에 봉착한 셈. 앤드류가 전 재산을 주인에게 주고 자유를 선언하자, 주인은 자유를 원한 댓가를 치르라며 떠날것을 종용하고 자유롭되 가족으로 남아 늘 하던대로 도우며 살고자 했던 앤드류는 결국 떠남을 선택한다. 그러나 16년 후 죽음을 맞게 된 주인은 앤드류가 자유를 원하는 건 당연했다고 말한 뒤 운명한다. 존재하는 한 사랑과 노동을 해야 하고, 생각하는 한 자유와 평등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 실존이니......

 

다시 앤드류는 "같은 존재"를 찾고 싶어져서 동류를 찾아 나선다. 실존하는 자들은 누구나 외로움을 느끼게 되나보다. 그래서 평등한 동류와의 연대는 실존하는 최상의 방법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로봇을 동류로 인정하지 않는데 로봇은 인간의 동류가 되기 위해 애써야 하는 등의 "불평등한 관계를 청산"하고자 하는 꿈. 결국 그 꿈을 이루게 되었을 때 로봇 앤드류는 모든 존재하는 생명체들처럼 죽음을 선택한다.

 

2005년 뉴저지로 팔려 온 4월 5일생 앤드류는 약 250년가량 살다가 스스로 사망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동류로서 사는 삶을 선택한 것처럼 사랑하는 아내가 없는 세상을 떠나기로 선택한 것이다. 나만큼 소중한 너와의 사랑에 빠져 쾌락을 만끽하는 것은 그래서 "죽여주는 것"이라고 하는가보다. 그런 앤드류가 "지능보다 성격이 있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하며 유쾌하게 지내는 여성로봇 갈라티와 자신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그 칩을 빼내기까지 한 것은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실망스럽기도 하다. 

 

신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독점적이거나 배타적이지 않고 모든 생명을 똑깥이 사랑하기 때문일것이다. 그래서 남미에서는 약자의 편을 드는 해방신학으로, 한국에서는 민중신학으로 발달한 것은 세상이 존재하는 이치와 진실이 그러하기 때문일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영원불멸의 신이겠는가. 신이 인간(여호수아. 예수)이 되어 사랑의 본질을 보여주었던 것에 비추어보면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은 아마도 너를 사랑하기 위해 "끝없이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비스끄레하게 나를 깨뜨리고 무너뜨리며 "죽으면 살리라" 말했던 영화들, 다시 보고 싶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밴디트> <처음 만나는 자유>. "죽여주는 사랑"을 선택한 앤드류의 자유(自有)를 지지하고  오늘 나는 누구를 위해 혹은 무엇을 위해 죽여주는 하루를 살까 생각해본다. 로봇은 산업사회의 모순을 꼬집는 정치적 재앙의 상징에서 탄생하였듯이, 나는 정보화와 세계화 사회의 모순을 꼬집는 상징으로 태어나 외치고 싶다. 유쾌한 성격의 갈라티, 왜곡 정보류를 공격하며 세계화에 반대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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