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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북>삶의 세렌디피티

2020-03-27 01:14:09

그린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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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정은 여러 중간 역을 경유한다. 그때마다 다양한 군상들과 맞닥뜨리지만 대개는 짧은 인연들이다. 그러나 그 중에는 뜻하잖게 동행자가 되어 종착역까지 함께 하는 이도 있다. 그 동행자와의 만남이 서로의 남은 여정을 훨씬 알찬 시간으로 만들어줄 때 그것은 기막힌 인연일 것이다. 대개는 비슷한 사람을 만나 동질감으로 쉽게 가까워질 때가 많지만, 드물게는 자신과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과 만날 때도 있다. 그럼에도 상대와의 교류로 자신을 되돌아보고 서로의 세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되었다면, 인간적인 성숙과 함께 스스로의 사유를 확장시키는 좋은 계기일 것이다.

 

영화 <그린북>의 시대적 배경은 1962년의 미국이다. 이태리계인 토니는 나이트클럽의 질서를 지키는 주먹꾼으로 월세를 걱정하며 가족들을 겨우 부양한다. 양가 사람으로 이루어진 토니의 대가족은 넉넉지는 않았지만 매우 화목했다. 그렇지만 클럽이 갑자기 2개월 휴업하자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단기 일거리를 찾게 되었다. 다행히 클럽에서 문제해결능력을 눈여겨본 주변인들의 소개로 자메이카계인 셜리 박사의 운전사로 단기 고용된다.

 

지식과 교양에 자산까지 갖춘 천재 피아니스트 셜리 박사와 허풍과 주먹만으로 어렵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토니의 모습은 매우 대조적이다. 1960년대의 미국은 아직 공공연한 인종차별과 함께 유색인종들은 대부분 빈곤층이었기에, 그들의 고용관계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그리고 남부지방은 아직도 인종차별이 많았으므로 영화는 처음부터 그들의 여정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예고한 셈이다. 클럽의 주먹군인 토니의 고용은 그러한 상황에서 보디가드의 임무를 겸한 것으로 보였다. 남부 지역은 피부색에 따라 출입이 결정되는 숙박시설이 많았기에 토니는 셜리박사의 숙박을 위해 수시로 그린 북을 보며 운전을 해야 했다. 남부에서 유색인종을 위한 숙박시설 안내책자인 ‘그린 북’을 영화 제목으로 쓴 것은 바로 이 영화가 인종차별을 다루고 있음을 알리는 메타포이다.

 

실존했던 셜리박사는 심리학과 예술학 박사이다. 둘 중의 하나만 해도 대단한 데 학문의 본류인 심리학과 음악을 같이 공부했다니 그야말로 놀라운 성취이다. 더구나 보통의 음악가가 아니라 전재 피아니스트였다니 말이다. 심리학도 그냥 공부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음악을 잠깐 접고 심리학 상담도 했었다 하니, 그는 이성과 감성을 겸비한 매우 뛰어난 존재로 여겨진다. 영화에서는 차에서 치킨을 손으로 먹는 것조차 질색할 정도의 완벽한 교양과 냉철한 지식인으로 묘사된다. “품격만이 이길 수 있어요”라고 토니에게 한 말에서 그의 정체성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상대의 무례함과 폭력에 같은 폭력으로 맞서기 보다 품격으로 대응하여 자기를 지키라는 조언이다. 악마를 상대하기 위해 똑같이 악마가 되는 것을 경계하는, 상당한 자기 철학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반면 토니는 그와 너무나도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었으니 두 사람의 갈등은 당연하였다. 그렇지만 여행이 이어지면서 토니는 셜리가 받는 부당한 대우를 통해 인종차별의 문제점을 하나씩 깨닫게 되었고, 문화적으로도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셜리 박사 또한 성실하게 일하는 토니의 진정성과 긍정적인 변화를 마침내 인정한다. 이때부터 둘은 호감을 갖고 서로를 대한다.


 

토니는 원래 집수리를 하러 온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대접했던 음료수잔 조차 버릴 정도의 인종 차별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유색인이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화장실 사용 거부, 술집에서 백인들의 집단 린치, 고속도로 불심검문 경찰관의 부당한 대우, 계약과 다른 고물 피아노 제공, 공연장이었던 레스토랑의 식사 거부 등의 부당함을 겪는 셜리 박사를 통해 인종차별의 문제점을 하나씩 깨닫게 된다. 무뢰배의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 효과를 거두기도 한다. 하지만 경찰관에 대한 폭력 대응으로 곤경에 빠지면서 셜리에게 폭력적인 습관을 버리라는 조언을 듣고부터 폭력에 의한 문제해결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여러 곤경과 에피소드를 겪으며 마침내 투어가 끝났다. 둘은 쏟아지는 폭설 속에서도 쉬지 않고 교대로 차를 운전하여 크리스마스 파티에 늦지 않게 뉴욕의 집에 도착한다. 그리고 토니의 대가족과 함께 하는 파티에 셜리 박사도 참석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렇게 맺어진 둘의 인연은 이후 죽을 때 까지 50년을 이어갔다. 또한 토니는 그 후 클럽에서 승진하여 관리자까지 올라갔다고 하는데, 셜리 박사와의 투어를 통한 문화적·지적 충격이 이후의 자기 발전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측된다. 어쨌거나 인종차별 시대에서 서로 곱지 않던 시선을 가졌던 두 흑백 남자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하고, 마침내는 서로를 인정하여 우정을 쌓아나가는 모습은 매우 감동적이다.

 

역사가 돈 리트너(Don Rittner)는 "역사는 타이밍과 사람, 환경과 세렌디피티가 어우러져 만들어진다"고 했다. 따라서 셜리와 토니의 좋은 만남이 타이밍과 세린디피티와 같은 우연적 요소만으로 이루어졌다고는 보기 힘들다. 그들의 주변에 배치된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이 어우러진 환경은 그들의 의지가 상당 부분 작용하여 형성된 요소들이다. 토니는 평소 유색인종을 차별했지만 변화의 여지를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에게는 유색인종을 차별하지 않는 아내가 있었고 그는 자기 아내를 존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는 파티에 온 셜리박사와 포옹하며 “편지 쓰는 것 도와줘서 고마워요”라고 인사말을 건넨다. 남편이 보낸 안부편지가 셜리박사의 도움을 받은 것임을 눈치 챈 것이다. 남편에게 전혀 내색치 않고 셜리박사에게 사례하는 모습은 참다운 사랑의 자세를 보여준다. 이러한 사람이 주변에 배치된 토니의 삶이 발전적이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역사가 돈 리트너가 역사를 만드는 조건으로 제시한 ‘사람(people)’은 이처럼 개인사에 더 크게 적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훗날 토니의 아들이 둘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자 찾아 갔을 때 셜리 박사는, “당신 아버지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그대로 옮긴다면 허락 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토니를 셜리 박사가 인간적으로 신뢰했음을 엿볼 수 있다. 사실 둘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본다면 셜리박사보다 토니가 받은 영향력이 훨씬 더 컸음은 자명하다. 셜리 박사는 이미 사회적 성취가 매우 높고 인간적인 측면 또한 상당히 성숙한 인간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왜 편하고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고 인종차별이 덜한 북부지역 공연을 마다하고 미 남부지역을 순회하였을까? 그것은 인종차별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쳐 보려는 사회개역 의지의 드러냄이었다.

 

셜리박사가 원래 심리학을 전공한데다가 상담경험까지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어쩌면 그는 투어 과정 내내 토니에게 일정한 심리·정서적 변화를 촉발시키려는 의도를 가졌는지도 모른다. 그는 유색인종이고 동성연애자에 천재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성공한 학자이다. 이는 그가 실은 어느 집단에도 제대로 정착하기 힘든 경계인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는 유색인종이되 유색인과 어울리기 힘들었고, 남자이되 남자가 아니었으며, 천재적 재능의 예술인이었지만 무시되기 십상이었고, 높은 학문적 성취를 이뤘지만 주류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위치에 있었다. 경계인은 그 불안한 위치 때문에 그것의 극복을 위하여 끊임없이 고민하고 활로를 모색하게 된다. 삶이 치열할수록 고뇌가 더 커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셜리박사가 밤마다 양주 한 병을 혼자 자작하는 광경은, 냉철한 완벽주의자적 삶을 영위하는 낮의 생활과는 또 다른 그의 내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흑백간의 ‘우정’을 키워드로 내세웠지만, 실은 셜리박사를 만난 토니의 행운담이라 보아야 한다. 토니의 캐릭터 또한 흥미롭긴 하지만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인간상이다. 그에 비해 셜리박사는 대개의 사람들이 일생을 통해 한번도 만나기 힘든 독특하고 희귀하며 진귀한 존재이다. 이러한 사람을,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던 토니가 만났다는 것이야 말로, 그의 삶에 있어서 최대의 세렌디피티일 것이다. 물론 토니 또한 셜리박사가 본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수긍하고 인정하는 수용의 자세가 있었다. 그러한 본인의 태도와 주변인들의 작용, 우연적 요소 등이 어우러진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사람의 인생이 삶의 중간역에서 우연히 이루어진 타자와의 조우로 인해 어떻게 변화될 수 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타이밍과 사람, 환경과 세렌디피티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한편의 서사였다. 그러나 명심하자, 타자와의 조우를 쉽게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결코 쉽지 않다. 타자와의 만남에 의해 변하려면 이미 준비된 자아가 항상 필요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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