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craft

<에이 아이>데이빗이 우리에게 준 선물

2020-03-30 02:57:52


 

 


 

 한참을 쉬어야지만 볼 수 있는 영화도 있나 봅니다. 항상 같은 부분에서 숨을 골라야 하고,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도 매양 동일한 부분에서 느껴지는 무너짐같은 허망함을 기어이 맛 봐야 하는 영화도 있는가 봅니다. 이렇게 저에게 내성이 생기지 않는 영화는, 그러므로 '슬픔'이 배가 될 혐의가 짙고 그런 영화를 보고 나면 항상 전 마음의 멀미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이런 지독한 마음의 멀미는 기어이 숨겨진 저의 '인간'에 대한 '비관'을 들추어 냅니다. 움직이고, 숨을 쉬며, 부딪히고, 사건을 만들어 내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의 이기심이나 또 다른 욕망들이 얽힌 사건의 배열을 제 비관의 관점 속에 차곡차곡 축적시키는 못된 버릇을 또 다시 드러내고 마는 것입니다. 항상 일정량의 회의를 품고 있는 관계에 대한 생각과 사랑에 대한 단상들을 '사람들'에게 대입시켜서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는 답들이 꽤나 많은 '부정'으로 이루어졌다는 이런 생각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단단한 껍질정도는 준비해 두자는 방어적인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마음의 멀미가 지독해지면 제 '회의'의 본연에 숨겨진 두려운 감정마저도 끌어낸다는 사실을 저는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이 '착한' 영화를 용서케 한 마지막 20분 장면을 저는 가끔 꿈처럼 기다리기도 합니다. 로봇인 '데이빗'의 힘겨우면서도 천진한 목적을 포함한 이 여행의 길목 길목에서 회의의 칼날로 데이빗을 위협하며 '웃기지 마'라는 말을 해 주고 싶어  안달이었던 제가 이내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장면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 속에 잠긴 뉴욕의 높은 마천루에서 깊은 바다로 떨어지는 데이빗의 무모한 용기의 발로가 고작 '사랑'이라는 점이 내내 뒤틀린 심사를 풀어주지 못해서 못마땅하기도 했습니다. 인간 '엄마'에게 버림받은 사실도 잊어 버리고 '이기적인' 인간의 가변적인 사랑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바보스럽기까지 한 순수함이 질리도록 혐오스럽기도 했습니다. '피노키오'의 메타포를 따라가서 만날 수 있는 동화 이야기의 '해피엔딩'이 실은 이 영화 내에서도 멀고도 지난한 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이 영화의 또 다른 '착하지' 않은 면을 보고서 내심 그것이 '사랑'을 믿고 있는 데이빗의 당연한 결과라는 비웃음도 보내고 싶었습니다. 언제나 항구적인 것들을 염원하고 그런 항구적인 것들을 염원할 수 있도록 영원히 아이로 만들어진 '데이빗'의 몸체가 견딜 수 있는 시간이 얼마일지 내내 쓴웃음을 지으면서 이 영화의 '사족'이라고 하는 20분을 남겨 둔 러닝 타임 동안 전 저만의 '회의'의 강도를 높여가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2천년이라니...... 감독의 지나친 의도를 따지기 전에 물리적인 개념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이 도저한 시간 속에서 데이빗이 견뎌낸 '사랑'이라는 글자가 하나도 변하지 않은 사실에 저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색이 전혀 바라지 않는 그의 '사랑'에 대한 간절함에는 인간이 아니므로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의 또다른 면이 숨겨져 있습니다. 인간이 아니어서 변하지 않은 사랑을 품을 수 있는 데이빗은 끝내 그 '사랑'에 대한 보답을 얻어냅니다. 그 때 저의 '데이빗'에 대한 '비웃음'의 한계도 무너져 버립니다. 이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인정하는 저는 지독한 마음의 멀미가 불러일으킨 저의 솔직한 모습을 가감없이 마주하게 되니까요. 내내 영화를 보면서도 '인간'이었던 저는 '데이빗'의 항구적인 믿음이나 사랑에 대한 간절함이 부러웠던 것입니다. 인간이 로봇에게 이식시킨 '사랑'의 정의를 인간보다 더 충실하게 이행한 데이빗의 어리석을 정도로 변하지 않은 간절함이 부러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지독한 간절함이 우리 인간들에게 대입하기 껄끄러운 감정이라는 짙은 절망이 '데이빗'의 여정을 남모르게 질투했던 또 다른 이유였습니다.

 

 

  데이빗이 부여받은 단 하루의 시간. 엄마와의 만남이 이뤄질 수 있는 시간의 상대적인 만남 속에서 마냥 행복한 데이빗을 보며, 마음의 멀미가 불러일으킨 눈물로 한동안 내내 영화를 보지 못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2천년의 지난한 기다림과 바꾼 단 하루의 시간 속에서 그리 행복할 수 있는 '데이빗'의 천진함과 바라지 않는 '사랑'의 모습이 제 마음의 '회의'를 넘어서는 미세한 부분을 건드립니다. 섬약하면서도 다치기 쉬운 그 감정은 인간이 내포한 가장 소중하면서도 연약한 그 '어떤 것'입니다. 그 '어떤 것'을 나름대로 명명하고 조형하는 일에 신경을 쓰는 것도 좋겠지만 때로는 그저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지레 짐작한 이 '어떤 것'을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은 다시금 제 '비관의 대상'인 인간의 모습을 새롭게 조감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리고 이런 감각을 고맙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필버그의 따뜻한 결말에 질린 저조차도 이 영화에 감도는 서늘한 기운으로 큐브릭의 숨결을 느끼고 다소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차갑고도 인간에 대한 냉소가 어느 정도 포함된 영화를 찍어 온 거장이 스필버그에게 이 영화를 왜 맡겼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조차도 자신의 냉소 속에 숨겨진 '어떤 것'을 만지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흰 생각도 해 봅니다. 결코 큐브릭같지 않지만 그렇다고 스필버그답지 않은 오묘한 이 영화는 그러므로 누군가 불평한 20분을 남겨 둔 시점에서는 항상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하는 독특한 영화입니다.

 

 

 데이빗의 엄마 모니카가 영원한 잠을 청하는 부분에서 항상 마음이 아립니다. 내성이 생기지 않는 영화는, 그러므로 저에게 영원한 미결로 남는 영화입니다. 데이빗의 잠이 그녀의 잠속으로 같이 스며드는 부분에서 사라짐보다는 영원이라고 하는 단어를 떠올리는 이유는 이런 감각이 우리의 일상에서는 너무나 소중한 것들이라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이런 감각을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이 영화에 어쩌면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변하지 않는 것들 앞에서는 너무나도 깨지고 쉽고 '유약한' 인간을 굳이 들추어내지 않아도 이 영화는 우리들에게 어떤 '각성'을 전해 주니까요. 물론 그 '각성'이 지독하게도 슬프고 외롭다는 단점은 제외한다 해도 말이지요.

 

삭제 수정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