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craft

<아이 캔 스피크>(추가) 메시지의 소중함을 지탱하지 못하는 작위적인 서사와 연출

2020-03-27 00:51:45




※ 영화 개봉 전, 브런치 무비 패스의 시사회를 통해 관람하였습니다.

※ 리뷰가 아닌 비평이기 때문에 첫 줄부터 마지막 줄 까지 스포일러로 가득 차 있습니다.

※ 영화를 볼 예정이라면 영화를 관람한 이후에 이 글을 읽기 바랍니다.



https://brunch.co.kr/@deadshot






 <아이 캔 스피크>의 심각한 문제는 주인공 나옥분(나문희)의 아픈 과거를 영화 중후반에 드러내기 위하여 그때까지 영화의 메시지와 전혀 연관성이 없는 사건들로 나열된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최소 30분, 어쩌면 그 이상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20년이 넘도록 8천 건의 민원을 넣어 명진구청의 블랙리스트로 오른 도깨비 할머니가 알고 보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반전을 내세우기 위해 영화는 '재개발을 둘러싼 시장 상인들과 건설사의 대립'이라는 불필요한 서사를 작동시키고 모든 인물들은 작위적인 서사에 철저히 기능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주인공들이 영화에 어떻게 등장하는지를 보라.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옥분은 비가 내리는 으슥한 밤 어떤 남자가 망치로 상가 외벽을 내리치고 황산을 붓는 장면을 지켜본다. 명진구청장은 박민재(이제훈)가 이전 용천구청에서 유능했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전근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민재에게 구청 중요사업 중 하나인 봉원시장 재개발 건에 대해 묻는다. 민재는 도대체 언제 준비했는지 이러한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재개발 중단 명령을 내려서 건설사에서 불복 소송을 하면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역이용해 구청에서는 주민들이 원하는 대로 재개발 반대를 위해 힘쓰고 있는 것처럼 보여주기 식 행정의 표본을 제안한다. 즉, 옥분은 재개발을 빨리 진행시키기 위해 상가를 고의로 훼손시키는 현장의 목격자로 등장하고 민재는 명진구청에 전근하자마자 재개발을 진행시킬 수 있는 핵심 아이디어 제공자로 등장한다. 영화는 마치 재개발로 인해 뭔가 큰 다툼이 벌어질 것처럼 요란스럽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봉원시장에서 재개발로 인해 강제로 가게를 철거해야 하는 인물은 유일하게 족발집 주인 혜정밖에 없으며 혜정을 위협하는 예림건설 대외지원사업부 패거리는 9급 공무원 민재의 한마디에 아무 저항 없이 굴복한다. 민재는 재개발과 관련된 소송의 판결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장은 강제철거를 할 수 없다고 했을 뿐이지만 옥분과 혜정 그리고 시장 사람들은 마치 재판에서 승소한 것 마냥 기뻐한다. 영화는 오프닝 쇼트부터 재개발로 인해 커다란 갈등이 벌어질 것처럼 유난을 떨다가 막상 이 서사를 제대로 작동시키지 않는데 왜냐하면 나중에 등장하게 될 위안부 청문회 서사를 진행시키는 것도 벅차기 때문이다. 고작 할 수 있는 건 고장 난 서사를 급하게 마무리 짓는 것뿐이다. 민재는 양 팀장에게 아이디어를 얘기했을 뿐 실행하라고 하지는 않았다며 궤변을 늘어놓고 재개발 사업의 핵심 관계자인 명진구청장은 옥분이 위안부 피해자라는 것을 인증하는 확인서에 도장을 찍음으로써 면죄부를 얻는다. 건설사에서는 불복 소송을 통해 재개발을 진행시켰을 것이고 혜정은 족발집을 결국 철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봉원시장의 풍경은 재개발의 공포는 사라지고 평화와 행복만이 가득하다. 영화 초반 망치와 황산으로 상가를 훼손시키는 인물로 추정되며 혜정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던 예림건설 패거리의 행동대장 빡빡이는 평화로운 시장 풍경 속에서 담배꽁초를 길가에 버리려다가 옥분에게 걸려 꽁초를 버리지 않는, 사소하지만 당연한 준법정신을 지키는 것으로 이미지 세탁에 성공한다. 영화에서 위안부 청문회 서사를 진행시킨 이후 선악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에서 필요한 악은 위안부 사건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 일본 정부로 족하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인물들의 불필요한 설정은 차고 넘친다. 민재와 민재의 동생 영재는 옥분과 유사가족의 이미지를 획득하기 위해 어머니와 아버지가 연년으로 사망해야 하는 불행한 존재이며(사망 이유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동료 구청 직원들로 등장하는 양 팀장과 종현, 아영은 영화의 분위기를 가볍게 하기 위해 시종일관 실없는 농담과 행동을 일삼는 기능적인 존재들이다. 옥분의 동생 정남은 누나를 보기 싫은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전화도 하지 말라며 화를 내더니 옥분이 위안부 증언을 하자 갑자기 옥분을 반갑게 대한다. 금주는 옥분의 친구 정심과 더불어 옥분이 위안부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으며 옥분이 위안부 증언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결정적인 인물이다. 정심은 치매라 제정신이 아니고 금주는 관객들에게 옥분이 위안부라는 사실을 알릴 수 있는 자격이 있지만 갑작스러운 공정일보 기자의 난입으로 인해 돋보일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다(내 기억이 맞다면 기자는 그 이후로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 굳이 한번 쓰고 버릴 인물에게 영화의 핵심 서사를 진행시킨 까닭을 나는 평생 알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아이 캔 스피크>에서 가장 불편한 지점은 영화 전개상 불필요한 서사가 되어버린 봉원시장 재개발의 서사가 희미하지만 은밀하게 '용산 참사'의 이미지를 소환한다는 것에 있다. 옥분이 위안부였던 과거를 드러내기 위해 영화는 잠시 1943년 만주로 향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과도하게 재현하거나 전시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예림건설 패거리 역시 혜정에게 소리를 지르고 한번 넘어뜨리지만 때리지는 않는다. 감독은 혜정에게 더욱 가혹한 폭력을 행하는 순간, 겨우겨우 힘겹게 마무리 지은 서사가 수습 불가능 상태가 될 거라는 사실을 알았던 모양이다. 나는 오히려 그것이 더 얄밉다. 잊지 말아야 할 비극의 역사를 상기시키기 위해 또 다른 비극을 어설프게 재현하여 소비시키는 행위가 과연 옳은지 말이다.


 이렇게 실패한 서사와 연출에도 불구하고 나옥분을 연기한 나문희의 연기는 빛이 난다. 워싱턴에서 옥분이 위안부 사건에 대해 증언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옥분의 얼굴에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고 미 하원의원들, 일본 의원들, 민재, 금주 등 이들의 리액션을 담아내기 바쁘다.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극적인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는 그때의 감정을 흩트려놓는데 일조한다. 정작 감동적인 장면은 옥분이 어머니의 묘에 찾아가 넋두리를 하는 장면과 봉원시장 내에서 옥분과 친하게 지내던 진주 슈퍼의 주인 진주댁이 옥분에게 섭섭하다고 한탄하는 장면이다. 배우의 연기만으로도 빈약한 서사가 풍요롭게 채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실로 오랜만에 경험하였다. 더욱 좋은 환경이었다면 얼마나 더 훌륭한 연기가 탄생했을지 너무나도 아쉽다.



------------------------------------------------------------------------------





 안 그래도 글에 미진한 부분이 있어 본문을 추가/수정할까 고민 중이었는데 피드백이 있어 추가합니다. 대신 내용을 추가하는 순간 사실상 다시 써야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어 본문의 문체와는 달리 편하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호호님의 말씀대로 나아가는 것이 이 영화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영화는 호호님의 말씀대로 가다가 손쉽게 포기해버립니다. 이 영화의 망가진 서사를 이해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최대한 논리적으로 추론해봅시다. 본문에서도 언급했듯 영화는 오프닝 쇼트부터 재개발로 인해 뭔가 큰 다툼이 벌어질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구청과 건설사의 반대세력, 예를 들어 재개발을 반대하는 시장상인연합 같은 하나의 집단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영화에는 혜정만이 재개발의 피해자로 등장합니다. 예림건설 빡빡이 패거리는 다른 상인들은 전혀 건드리지 않고 오로지 혜정만 괴롭힙니다. 구청과 건설사는 오직 혜정 한 명을 속이기 위해 불필요한 불복 소송까지 하며 짜고 치는 고스톱을 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왜 빡빡이 패거리는 혜정만 건드릴까요? 영화 내에서 가장 납득할만한 이유를 찾는다면 ‘혜정을 제외하고 옥분을 포함한 나머지 상인들이 건설사와 이미 합의를 마쳤기 때문에 패거리가 건드릴 수 없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합의를 하지 않았다면 빡빡이 패거리는 다른 상인들에게도 협박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버리면 옥분은 영화 처음부터 재개발을 그렇게 열심히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본인을 포함한 거의 모든 상인들이 재개발에 대해 합의했는데 말입니다. 만약 보상이 충분하지 않았지만 건설사의 횡포가 두려워 상인들이 억지로 합의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옥분은 시청에 가서 보상을 더 달라는 식으로 항의했을 겁니다. 즉, 서사 내적으로는 빡빡이 패거리가 왜 혜정만 건드리는지 파악할 수 없습니다.

 

 또, 이상한 점은 옥분이 경찰을 찾지 않는다는 겁니다. 옥분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어떤 남자가 외벽을 마음대로 부수는, 타인재물손괴 혹은 기물파손죄가 성립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런데 옥분은 이상하게도 경찰이 아닌 구청을 향해 갑니다. 옥분은 20년 넘도록 8천 건의 민원을 넣으며 보통 시민들보다는 훨씬 법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되지만 결국 범인을 잡으려면 경찰이 수사해야 한다는 사실은 모르는 걸까요. 이 역시 서사 내적으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이 모순들을 파악 하려면 서사 외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빡빡이 패거리가 혜정만을 건드리는 모순을 영화 내적으로 해결하는 간단한 방법은 재개발을 반대하는 상인들을 혜정 외에도 여러 명 두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영화의 서사는 점점 거대해지고 옥분이 경찰을 불러서 재개발 과정에 경찰이 개입되는 순간 역시 영화의 서사는 거대해집니다. 혜정과 빡빡이 패거리의 대립에 경찰이 개입되면, 그리고 용역으로 등장하는 빡빡이 패거리가 혜정에게 조금이라도 폭력을 가하게 된다면 재개발에 관한 대립 중 가장 유명한 용산참사의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소환하게 될 겁니다. 감독은 뭔가 제대로 해볼려고 시도하면 시도할수록 자신이 점점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 알았을겁니다. 그래서 '감독은 후반에 위안부 서사를 진행시키는 것도 벅찼기 때문에 몇 가지 요소들을 제거하다보니 모순이 발생되었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제가 본문에 언급한 불필요, 불편한 부분들은 하나같이 서사 내적으로는 파악이 되지 않는 부분들입니다. 그래서 서사 외적으로 파악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작위적'이라는 단어를 쓸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빡빡이라는 캐릭터는 자신을 용팔이라고 부르며 거친 용역깡패의 이미지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감독의 의도대로 상인들 중 혜정만을 괴롭혀야 하고 그녀를 직접적으로 때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용역깡패인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게 담배꽁초를 길가에 버리려다가 옥분에게 걸려 수줍게 웃는 것으로 평화로운 봉원 시장의 풍경을 훼손시키면 안 됩니다. 결국 가장 큰 악 '일본 정부'에게도 밀려 이도저도 아닌 캐릭터가 됩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은 이런 작위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데 일일이 나열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 같습니다.


 이러한 영화의 단점들은 감독의 안일한 선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감독의 편의로 훼손된 재개발의 서사가 과연 ‘약자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의 상징’이 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사회적 약자인 위안부의 서사는 그렇게 중요하고 소중히 다루면서도 또 다른 사회적 약자인 재개발 피해자들의 서사는 수습 불가하여 은근슬쩍 위안부 서사의 해피엔딩에 기대어 얼토당토않게 끝내는 의도가 뻔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감독이 "얄밉습니다". 호호님의 말씀대로 하려다가 쉽게 포기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삭제 수정 목록